2023. 3. 9. 14:09ㆍ문학역사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이육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청포도", "광야", "꽃"등이 있는데,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수록이 되어 많은 학생들이 접해봤을 듯하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
이육사로 잘 알려진 민족저항시인 이원록은 1927년 10월 일제수탈의 원형인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수감되는데 그 당시 수감번호가 264번이다.
그리고 이육사의 다른 뜻으로 죽을 육의 역사사를 사용해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뜻도 있다.
이육사는 조선은행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3년의 형을 치렀다.
2년 후인 1929년 조선은행 폭파 사건의 실제 인물인 장진홍이 일본에서 체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이육사는 감옥에서 나올수 있었다.
출옥 후에 약 10년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를 하게 되는데 1930년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게 된다.
이때 교보생명을 창업하는 신용호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교육보험사업의 설립에 영향을 준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이육사는 총 17번이나 수감이 되었다.
이육사의 분노
이육사의 아버지 이가호는 퇴계이황의 13대손이며 이육사는 6형제 중의 차남이다.
외삼촌 안병철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혔는데 일본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자백을 하게 된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이육사는 크게 분노했으며 외삼촌 안병철의 빰을 때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7년 동안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가 나중에 이야기했다.

옥중 순국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막냇동생 원창이 사망 소식을 듣고 북경으로 갔다.
이미 시신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있었고 북경주제 일본 영사관의 작은 상자에 담겨 있었다.
원창은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로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으며 1960년 이육사의 고향으로 이장된다.
민족시인 윤동주 보다 1년 앞서 순국했으며 두 분 다 1945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이슬로 사라졌다.
이육사는 자신의 작품집을 볼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육사가 1944년 사망하고 나서1946년에 동생 이원조가 "육사 시집"을 발간하면서 첫 작품집이 탄생하게 된다.
이 작품집은 서울출판사에서 초판이 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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