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시인 심훈의 집안은 친일파 그리고 영화

2023. 3. 13. 14:12문학역사

반응형

본명은 심대섭이다
그는 매우 잘생겼고 성격이 밝았으며 언행도 거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글 쓰는 속도가 무지 빨랐으며 "직녀성"은 한 달, "상록수"는 약 두어 달만에 탈고했다고 한다.

 

 

심훈
심훈

심훈의 집안은 친일파


심훈은 집안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심훈의 두 형은 친일파였고 집안은 양반 가문의 중산지주 계급으로 친일가문이었다. 

또한 그의 첫번째 아내는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의 누이 이혜영이었다.


유명한 일화중에 그가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당시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을 비하하고 모욕하자 수학시험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낙제하여 유급되었지만 그는 후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심훈은 4학년이 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게 되며 3월 5일 남대문 학생시위로 구속되어 8개월형을 산다. 

물론 다니던 학교에서도 퇴학 당한다.

심훈이 채포 되었을때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평소 성품과 행실을 조사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영리하나 경솔하여 모든 명령 등을 확실하게 실행하지 않는다."

"게으른 편이어서 결석·지각 등이 많고 평소부터 훈계를 받아 온 자"



심훈의 즉흥시


그와 관련 있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박열(朴烈)이 있고 이 둘은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다.
박헌영과도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는데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자 그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분노하여 지은 시도 있다.


1936년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과 남승룡이 금매달과 동메달을 따자 동갑내기였던 심훈이 그들을 위해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지었다


 

심훈과 영화


1927년 심훈은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를 하였으며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집필 및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사영하였다.
먼동이 뜰 때라는 영화는 식민지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심훈의 상록수는 두번 영화화 되었는데 첫번째는 1961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서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두번째는 1978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작품 "직녀성"도 나중에 이성구 감독에 의해 스크린에 상영된다

 

영화 상록수의 한장면
영화 상록수의 한장면

 

심훈의 사망


1936년 9월 16일 아침 8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추도사를 읽으며 관을 앞에두고 오열했다고 한다.

참고로 민족 시인 김소월은 심훈보다 2년 먼저(1934년) 사망 하였다.


나중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