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 문학인 중에서 유일하게 반성한 채만식

2023. 3. 15. 13:36문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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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의 매국

 

"그러하여야만 조선 사람으로서의 '닛본징(일본인)'인 도리를 다함이려니와 동시에 '닛본징'으로서의 조선 사람이 진정한 행복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글은 1942년 매일신보에 실렸던 "아름다운 새벽"의 일부분이다.
채만식은 소설을 통해서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장려하고 이 행위를 정당화한 하였다.

 

채만식
채만식

광복 후 채만식


채만식이 조선이 일제치하에서 독립하고 광복을 맞이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그는 광복후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당시 친일파 문학인 들은 광복 후에 친일의 행적들을 부인하거나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서 한 일이라고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채만식의 경우는 소설 1948년 "민족의 죄인"을 출간하고 과거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다.

 

채만식과 음식


채만식은 평소에 고기를 즐겨 먹었다. 물론 채만식의 형편이 좋아서 고기를 즐겨 먹은 것은 아니며 생활은 넉넉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채만식은 항시 고기반찬이 있어야 식사를 했다.
일화 중에 채만식의 지인이 채만식과 식사를 하다가 채만식의 밥상을 보고 이렇게 고기를 좋아하니 
채만식을 '육(肉) 만식(食)'으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라는 농을 던지기도 했다.
또한 채만식은 불면증이 있었으며 불면증을 해소하고자 포도주를 마셨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고등학교 시절 채만식 (왼쪽 두번째)
고등학교 시절 채만식 (왼쪽 두번째)

 

채만식의 결혼, 성격

18세에 부모님이 정해준 여인과 혼인하였다.

당시 채만식은 중앙보고 2학년이었는데 집에서 결혼을 해야 하니 내려오라는 편지를 받고 전북으로 내려갔다.

예전 결혼 풍습이 그러하듯이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혼인해야 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채만식은 결혼 시작부터 별거를 했으며, 아내 "은선흥"은 채만식과 정을 느끼지 못하여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

 

채만식은 결벽증이 심했다.

어딜 가던 자기 숟가락을 가지고 다녔고,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 바닥을 손을 쓸어 먼지를 없앴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호텔이 아니면 안되었고 한 여름에도 정장에 모자와 외투를 걸쳤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그를 "불란서 백작" 이라고 불렀다.

 

 

 

 

 

채만식의 사망


채만식은 광복 후 5년후에 생을 마감했다.
1950년 6월11일 사망을 했는데, 정확히 한국전쟁 2주 전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48세였고 병명은 "폐결핵"이었다. 임종 전에는 "민주적 민족주의 만세"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사진을 찍을때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사망 두어달 전에 남긴 말은,

 

인편이 가능하면 원고지 20권만 보내 주소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 
이제 임종이 가깝다는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 보고 싶은 걸세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그가 평소 가난하게 지냈기 때문에 글을 쓸 원고지가 항시 부족했고, 죽음을 직감한 채만식이 죽기 전이라도 쌓여 있는 원고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훈


1984년에 월명공원에 백릉 채만식 문학비 건립되었고 
1996년에는 채만식 소설비가 건립되었다.
2002년 채만식문학상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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