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의 짝사랑 그리고 죽음

2023. 3. 8. 21:24문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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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라는 것인데 좀 더 윤동주를 알고 싶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저항시인으로 유명하다.

 

윤동주와 학우들 (윤동주 뒤쪽 오른쪽)
윤동주와 학우들 (윤동주 뒤쪽 오른쪽)

2010년에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이 공개되었는데, 그중 그의 어록을 하나 살펴보면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회유

1930년에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 많은 조선 문인들이 그 회유책에 넘어가서 절필, 변절등이 만연했는데, 윤동주는 이러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민족 시인으로써의 이름을 지켜 갈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회유책에 뜻을 굽히지 않은 시인 중에는 이육사도 있다.

 

윤동주는 형제가 총 7남매였고 그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실 윤동주 전에 누이 둘이 있었으나 누이 둘은 사망했고 그다음에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의 기대가 컸다. 그리고 동생 중에 애기 때 죽은 동생이 하나 있다.

 

사망과 의혹

그는 1943년 7월에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형무소로 잡혀 왔으며, 2년 후인 1945년 27세의 젋은 나이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5촌 당숙인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가서 고종사촌 송몽규를 면회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이상한 주사를 맞았다고 했고, 어떤 주사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같은 주사를 맞은 송몽규도 얼마 후에 사망했다.

그 주사는 일본이 의학 실험으로 혈액 대체제를 개발하기 위해서 실험을 했고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윤동주 마지막 사진 1943년 (가운데 앞)
윤동주 마지막 사진 1943년 (가운데 앞)

 

윤동주의 사랑

윤동주의 동생 윤혜원은 이렇게 말했다
오빠 윤동주는 여자친구 조차 없었으나 일본 유학 중에 박춘애라는 여학생의 사진을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가 좋아하셨기 때문에 윤동주는 박춘애와 결홀을 할 뻔 했었다.
그리고
윤혜원의 남편 오형범은 해방후에 박춘애를 만났었고 박춘애에게 물어보니 윤동주는 짝사랑만 했을 뿐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 "사랑의 전당", "소년", "눈오는 지도"에 순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순이라는 이름이 박춘애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에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윤동주의 사랑의 표현 방식의 또 다른 고백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

1990년 일본 교과서에 윤동주의 시가 실렸다.

국어 과목의 현대문 교제이며 윤동주의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쉽게 씌여진 시", "동생의 인상화", "돌아와 보는 밤" 등이 실렸다.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

 

중국의 역사 왜곡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린 것인데, 윤동주는 출생지가 중국 길림성이라는 점 때문에 그렇게 포장하는 듯하다.

윤동주가 비록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했으나, 1935년 평양의 숭실 중학교에 편입을 하여 조선에서 공부를 했고 일본 유학을 했다.

그는 시를 쓸 때 한글로만 썼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광복 45주년을 맞아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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